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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언어(Musik und Sprache) 6 1 음악과 언어(Musik und Sprache) 6( 최종 ) 편집자 : 「음악과 언어」 6T.게오르기아데 스의『음악과 언어』 -미사곡 창작의 시각에서 서양음악의 생성-(베를린: 하이델베르크·뉴욕: 프링어출판사,1974,2)마지막 번역글이다. 책은 게오르기아데스가 뮌헨대학교 음악학 수시절에 출판한 것으로, 그동안의 번역은 조선 우박사와 권오연박사가 맡아왔다. T.Georgiades 12. 음악실재의 단계들 ( 팔레스트리나 - 몬테베르디와 바하 - 비엔나 고전시대 음악가들) 앞장의 마지막 언급은 비엔나 고전시대 말기에 등장한 하나의 중요한 (動因)제시한다. 여기서 이것의 생성과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때까지의 음악사적 사건이 함축하는 내용에 대하여 질문할 필요 있다. 사실 지금까지의 제시과정은 팔레스트리나 이후 악곡의 음악적-법적 원리에 관한 문제를 아주 소홀히 다루었다. 정신자세와 관련된 것은 악곡기법에 대한 정교한 분석의 토대 위에서만 드러난다. 의미소지자[Sinntr ger 악곡]마지막 전제들에 관한 숙고만이 정신자세를 이해 가능한 작곡 기법으로, 대상화된 의미로 나타나는 지점까지, [작곡가의] 고유한 본질까지 파고들 있도록 한다. 그래서 우리는 팔레스트리나부터 비엔나 고전주의 음악가들까지의 악곡을 고찰하고자 한다. 팔레스트리나로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단계에 들어와서 비로소 [인간]정신이 음악적 자료를 남김없이 관통할 있었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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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과 언어(Musik und Sprache) 6 1

    음악과 언어(Musik und Sprache) 6(최종 회)

    편집자 주: 「음악과 언어」 6은 T.게오르기아데스의 『음악과 언어』-미사곡 창작의 시각에서 본 서양음악의 생성-(베를린:하이델베르크·뉴욕:슈프링어출판사,1974,제2판)의 마지막 번역글이다. 이 책은 게오르기아데스가 뮌헨대학교 음악학 교수시절에 출판한 것으로, 그동안의 번역은 조선우박사와 권오연박사가 맡아왔다.

    T.Georgiades 저 조 선 우 역

    12. 음악실재의 단계들 (팔레스트리나 - 몬테베르디와 바하 - 비엔나 고전시대 음악가들)

    앞장의 마지막 언급은 비엔나 고전시대 말기에 등장한 하나의 중요한 동

    인(動因)을 제시한다. 여기서 이것의 생성과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그 때까지의 음악사적 사건이 함축하는 내용에 대하여 질문할 필요

    가 있다. 사실 지금까지의 제시과정은 팔레스트리나 이후 악곡의 음악적-기

    법적 원리에 관한 문제를 아주 소홀히 다루었다. 정신자세와 관련된 것은

    악곡기법에 대한 정교한 분석의 토대 위에서만 드러난다. 의미소지자[Sinntr

    ger 악곡]의 마지막 전제들에 관한 숙고만이 정신자세를 이해 가능한 작곡

    기법으로, 대상화된 의미로 나타나는 그 지점까지, 즉 [작곡가의] 고유한 삶

    의 본질까지 파고들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우리는 팔레스트리나부터 비엔나 고전주의 음악가들까지의 악곡을

    고찰하고자 한다. 팔레스트리나로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이 단계에 들어와서

    야 비로소 [인간]정신이 음악적 자료를 남김없이 관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

  • 2 음악과 민족 제18호

    다. 이 점은 우리가 앞부분에서 잠시 거론한 바 있다(45 및 48쪽 참조). 이

    때부터 사람은 리듬적, 선율적 그리고 동시울림(Zusammenklang)적 요소로서

    의 음(Ton)의 주인이 되었다. 팔레스트리나는 이 개별음(=개별적 음, einzelner Ton =

    Einzelton)으로 작업할 수 있었다.

    이 점을 분명하게 밝혀보자. 서양의 다성음악은 단성부의 전례노래[=그레

    고리오성가]와 동시울림에 기초하는 [새로운] 음악을 만나면서 생성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일천년대의 전환기 이후 개별적 동시울림들로 독립되었다.

    그리고 이것들은 획일적 소리공간(Klangraum)을 넘어 독자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26쪽 참조). 그러나 이 시기의 개별적 동시울림이 1600년 이후 음악

    의 화현(和絃 Akkord)과 동일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앞서 확인한 바 있다

    (26쪽 참조). 동시울림은 자체 안에 운동(Bewegung) 즉 소리요소들의 진동

    (Oszillieren)을 함축한다. 이것은 장식적인 즉흥연주 실제에서 나타났다. 이

    제 여기서 출발하여, 어떻게 즉흥연주의 관습에서 악보로 고정된 본격적인

    작품이 생성되었는지를 고찰하자. 그러면 우리는 팔레스트리나까지의 다성

    음악의 변화과정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선율진행의 예술

    (Kunst der melodief hrung)과 선율선(線, Linie)들을 ‘엮는’ 폴리포니 예술

    (polyphone Verflechtung)이 성장하였다는 사실도 대단히 중요하다. 개별적 동

    시울림들의 즉흥적 유희단계에서부터 강박에는 오로지 협화음정을 사용한

    다는 규칙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협화음정들은 본래 하나의 [음]덩어리였

    던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았던] 동시울림을 구성하는 요소들이었

    다. 그러므로 이 규범은 [강약의] 무게차이를 구분짓는 동시울림들이 리듬적

    요소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동시울림들]의 울림은 이

    성적으로도 규범적으로도 파악되지 않았다. 이것은 설령 악보로 고정되었다

    하더라도 아직은 광의의 즉흥연주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이것은 아직 독자

    적인 선율진행을 이루지 못한 채 다만 시간 안에서 전개되던 동시울림일 뿐

    이고, 유희적으로 변화하는 하나의 난해한 전체였다. 개별음은 아직 분리될

    수 없었다. 아직은 사람들이 이것을 장식의 범주에서부터 해방시킬 수 없었

    다. 그래서 주요 동시울림들 곧 울림기둥(Klangs ulen)들 사이에서 장식적

    작업에 의하여 생성되는 이 동시울림들은 우연의 결과였다. 사람들은 이 동

    시울림의 생성을 개별적 [和絃 곧 Akkord의] 차원에서 고찰하지도 언급하지

  • 음악과 언어(Musik und Sprache) 6 3

    도 않았다. 중세에서 팔레스트리나까지의 다성음악 변천과정은 성부진행의

    정련과정(精練過程)으로 특징지어진다. 비이성적 소리유희는 점차 성부들의

    세공(細工, Geflecht)에 의한 이성적 진행으로 대체되었다. 물론 이것은 개별

    적인 선율을 그 구성요소들로 분해하는 과정을 통하여 비로소 가능해졌다.

    이렇게 분리된 음은 사람들에게 음의 위상을 리듬, 선율 그리고 울림의 시

    각에서 자유롭게 규정하도록 하며 [자신의 선택에] 스스로 책임질 수 있도

    록 하였다. 이미 실천해오던 강박의 협화음 규정은 여기서 근원적으로 그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토대 위에서 성부진행을

    개별적으로 파악하고, 모든 동시울림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악곡(musikalischer

    Satz)이 생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악곡은 [15세기의] 네덜란드 작곡가

    들에게서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게 마지막 우연성들은 팔레스트리나의 작품에서 비로소 지양되었다.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이 앞선 시대의 음악보다 더 유연한 것도 여기서 비롯

    된다. 그의 음악은 불협화음정의 사용을 줄이고, 선율과 리듬의 급격한 변화

    도 줄인다. 그러나 이를 누가 팔레스트리나의 소심함 때문이라거나 혹은 팔

    레스트리나 이전 음악의 불협화음정이 대담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면, 그것

    은 분명 잘못일 것이다. 팔레스트리나 악곡의 유연성은 그가 엄격대위법

    (strenge Polyphonie)의 단계에 도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1)

    이제 선율선은 개별음들을 짜맞추어 만들어진다. 선율선은 어휘의 본래

    뜻대로 ‘짜맞춘 것’(kom-poniert)이다. 유연하고 그래서 튀지 않고 자연적이

    며 우아한 선율진행은 여기서 생성된다. 이것은 모든 [인위적인] 막힘을 거

    부하며 ‘고요하게 흐르는 강물’로 비유된다(예폐센, Jeppesen). 우리는 복합적

    인 악곡특징들로부터 적어도 아래 몇 가지를 도출해 낼 수 있다(팔레스트리

    나의 모든 작품은 다 보기가 될 수 있다. 46, 54, 73쪽의 예보 참조). 즉 음들

    은 주로 순차진행을 한다. 도약 후에는 균형을 잡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4분

    음표 강박에서는 상행진행을 하지 않는다(54쪽의 예보). 상행하는 움직임은

    템포를 늦추고, 하행할 때는 빠르게 진행한다. 팔레스트리나의 선율선에는

    1) 우리는 팔레스트리나 대위법을 정확히 분석한 예페센(Knud Jeppersen)의 근본적인 작업에 감사

    한다. 『팔레스트리나 양식과 불협화음정』, 라이프치히 1925. 그리고 「팔레스트리나의 대위법 - 고전적 성악폴리포니 교재』, 라이프치히 1935.

  • 4 음악과 민족 제18호

    순수 장식음이나 꾸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 개별음은 곧 본체(本體,

    Substanz)이다. 그러므로 스테레오형의 미사여구들도 - 특정 음형을 다른 높

    이의 음에서 반복하는 - 동형진행(Sequenzen)도 있을 수 없다. 이러한 형태

    들은 개별음의 독자성을 포기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별음은 또한 동시울림의 [성격규명을 위한] 평가의 출발점이 된다. 팔레

    스트리나의 폴리포니에서 선율선들은 가능한한 서로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진행해야 한다. 이는 선율의 진행에서 생성되는 동시울림들이 튀지 말아야

    하고, 규범 안에서 협화적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달리 표현하여, 모든 개별

    음은 독자적으로 사용되나 동시에 함께 울리는 다른 음과의 관계를 검토한

    다. 즉 개별음은 선율선의 구성요소로 선율진행을 통하여 나타나는 낱개의

    동시울림을 긍정하며 그 동시울림의 이성적 구성요소가 된다. 이렇게 개별

    음은 음향적 시각에서 더 이상 우연의 결과이거나 터무니없는 어떤 것일 수

    없다. 강박의 핵심울림들이 협화적이어야 한다는 초기의 기본규범은 이제

    이 핵심울림들 사이에서 진행하는 성부들의 동시울림까지도 규정하는 다양

    한 시각을 함축하게 되었다. 이 규정의 토대는 협화음정이다. 즉 삼화음(예.

    f'- a'- c'', Et adorate, 54쪽의 2번째 마디)과 3-6도 울림(예. f'- a'- d'', 상동)이다.

    이 두 울림은 아무런 제약 없이 사용된다. 그러나 불협화음정들은 특이한

    전제들 아래서 나타난다. 즉 이들은 약박에만 올 수 있다. 특히 순차적으로

    도입되거나 진행할 수 있다. 이들은 이른바 경과적 불협화음정들이다(예. et

    incarnatus, 73쪽의 5번째 마디의 테너).

    이 밖에도 당김음(Synkope 싱코페이션)이라는 의도적인 불협화음정이 있다.

    이것은 기대되는 협화음정의 출현이 연기되면서 강박에 나타난다(예. Et

    incarnatus, 5-6마디의 앨토). 이 당김음은 협화음정과 불협화음정의 규범이 엄

    격히 구분되면서 나타날 수 있었다. 또한 이것은 2분음표( )의 균형잡

    힌 상·하행 진행을 통한 시간(박자)의 규칙적 분할을 전제한다.1) 당김음은

    2) 팔레스트리나 음악의 균형잡힌 흐름은 산문시(Prosa)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기악적 계속저음

    폴리포니도 윤곽만 보여주는 불분명한 박자 속에서(81쪽과 비교하라) 아직 산문시적 형태를 갖고 있다. Th.게오르기아데스, 『그리스의 리듬』(Der griechische Rhythmus, 7쪽의 각주), 41쪽 이하를 참조하라.

  • 음악과 언어(Musik und Sprache) 6 5

    다음 박에서 다시 협화음정으로 해결되는 일종의 가벼운 정체현상(Stauung)으로

    작용한다. 이를 체계적으로 제시한다.

    이와 달리, 경과적 불협화음정들은

    아래와 같이 제시될 수 있다.

    점(·)들을 통한 위의 예보 제시는 개별음이 독자적인 요소로 취급된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경과적 불협화음정들에

    서 좋은 시간[gute Zeit, 강박]의 협화적 동시울림을 듣는다. 이 관계는 약박

    에서 구속력을 상실한다. 그러나 음은 일종의 경과음으로 선율적 의미를 유

    지한다. 이 음은 순차적으로 협화음정으로 진행한다. 이렇게 모든 음은 동시

    에 울리는 다른 음들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도입되고 및 계속되는 그 진행에

    서 저절로 완전하게 파악된다. 음은 개별적으로 청취될 수 있다. 그리고 마

    지막 구성요소 곧 개별음까지의 이 해체가 드디어 새로운 포괄적 청취의 가

    능성을 허락한다. 이제 비로소 사람들은 앞서 언급한 당김음( )의

    체계적 제시가 상징하는 관련성을 바르게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삼화음과 3-6도 울림 등 협화적 동시울림들도 개별적으로 청취되

    어야 한다. 그것들은 더 높은 차원의 일치에 종속되지 않는다. 삼화음들은

    흔히 베이스의 4도 혹은 5도 음정으로 묶어주는 근친관계의 원칙

    (Verwandtschaftsprinzip, 41쪽 참조)에 따라 연결된다(Et incarnatus에서 G, C, F,

  • 6 음악과 민족 제18호

    C, g음 위의 삼화음 참조). 여기서 이러한 [삼화음적] 울림들의 교차가 나타

    난다. 그러나 이들은 독자성을 상실하지 않는다. 이들은 전체를 역동적으로

    만들거나 긴장을 형성하지 않는다. 이들은 정적(靜的)이다. 이렇게 이들은

    급하게, 어떠한 중재도 없이 연결될 수 있다(Et incarnatus, 6번째 마디 이하,

    A와 F 위의 삼화음). 3-6도 울림들은 이들 사이에서 나타나거나 14 혹은 15

    세기에서처럼 일련의 울림들(Klangreihe) 곧 경과적 진행(G nge)을 형성한다

    (37쪽. 특히 팔레스트리나의 ‘descendit', 1번째 마디 이하를 비교하라). 때문에

    울림들은 마치 음들의 경우처럼 느슨하게 연결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그래

    서 음들과 울림들의 구조는 다만 ‘명상적’(beschaulichen)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 둘 사이에 어떠한 긴장도 나타나지 않는다. 모든 음은 일차적으

    로 그 자체에 관련되고 스스로에 의존한다.

    그러면 이러한 음악적 태도에는 어떠한 정신적 구조가 상응할 수 있을까?

    팔레스트리나는 더 이상 해체할 수 없는 요소들인 개별음들로 작업하였다.

    개별음들은 내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들은 내면을 갖고 있지 않다. 이들은

    우리가 오직 밖으로부터 접근할 수 있는 낱개의 돌들에 비유될 수 있다. 우

    리는 그것들을 오직 밖에서부터 질서매길 수 있다. 한 음에서 다른 이웃음

    으로의 진행이유는 음 자체가 아니라 음의 밖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리듬과

    선율의 관련성뿐 아니라 동시울림의 관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여기서 공동

    으로 작용하는 개별음들이 상호 조화를 이루는가 하는 질문도 제기된다. 만

    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어딘가에 진행의 강요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강요는 밖에서부터 온다. 개별적인 선율선들은 진행에서 발생하는 수직적인

    마찰에 의하여 결정된다. 이것은 팔레스트리나 악곡의 [선율]진행이 ‘외적인

    이유’에 의하여 생성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것은 움직임의 의지를 자

    신의 내부에서부터 스스로 발전시키지 못하면서도, 물이 낙하원칙에 따라

    움직이고 돌들이 충격이나 바닥의 경사에 의하여 움직이게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팔레스트리나의 악곡은 마치 자연과정(Naturvorgang)과 비교할 수 있

    다. 그의 악곡은 자연 곧 생명없는 자연의 표상과 같다. [악곡을 구성하는]

    요소는 무생명체와 관련된다. 이 요소는 외적인 작용들을 통하여 움직여진

    다. 우리는 이 작용 곧 움직임의 근원을 정확하게 규명할 수 있다. 마찬가지

  • 음악과 언어(Musik und Sprache) 6 7

    로 그 결과도 밝혀낼 수 있다. 이렇게 팔레스트리나의 악곡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인과율의 원리에서처럼 측량가능하다. 팔레스트리나의 예술악곡

    은 고전적 자연과학에 비유된다. 우리는 그의 음악에서 목적지향성도, 내면

    적 경향도, 목적론적인 어떤 것도, 어떠한 유기적 행위도, 유기적인 것에 비

    유될 수 있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팔레스트리나의 악곡은

    ‘자연적’으로 작용한다고 하거나(45 그리고 104쪽), 자연이나 자연현상과 비

    교될 때, 보다 의미깊은 정당성을 부여받게 된다. 팔레스트리나의 악곡은 수

    정처럼 맑은 물, 순수한 수정, 자연의 경이로움을 연상케 한다. 이것은 ‘생

    동적’이지도 ‘유기적’이지도 않고 오직 ‘자연적’이다.

    *

    두 번째 단계는 약 1600년부터 1750년까지로 하고, 이를 계속저음시대

    (Generalba zeit)로 표기하자. 음악이 아직 언어작곡이었던 몬테베르디와 쉿

    츠에게는 [가사의] 의미에 상응하는 표현이 핵심 관심사였다. 이들에게는 후

    에 바하의 기악 폴리포니에서 나타나는 명백한 특징들같은 새로운 단계의

    독특함이 아직 분명하지 않다.

    당김음의 예는 개별 음들로의 분해를 전제로 하는 새로운 포괄적 청취가

    어떻게 생성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105쪽 참조). 팔레스트리나 악곡의

    다른 몇몇 예들은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예들은 어떻

    게 보면 [발명]특허와 같은 것이다. 이들은 엄격한 규범들을 넘어선다(점‘·’

    들은 앞 예보처럼, 아래의 체계에서도 음들의 단순한 나열을 의미한다. 물론

    곡선은 관련적으로 청취해야 하는 선율을 지시한다).

  • 8 음악과 민족 제18호

    이러한 악절들은 팔레스트리나의 [작곡]관습에서부터 이해될 수 있고 팔

    레스트리나 악곡의 의미범주 안에서 청취해야 한다. 그러나 이 악절들은 우

    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하고 나아가 새로운 관련성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경향은 이 악절들을 하나의 전체로 청취할 수 있도록 하는 좋은

    출발점을 제공한다. 위의 마지막 예보에서 두 번째 2분음표 중성(c“)은 하성

    (g')과 4도의 불협화음정을 이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성은 세 번째 2분

    음표로 이어진다. 이러한 불규칙성은 먼저 상성(d")과의 더 예리한 (2도) 불

    협화음정, 네 번째 2분음표(b‘)로의 해결, 첫 2분음표 이래 줄곧 이어지는 g'

    음 울림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네 번째 2분음표에 도달

    할 때 첫 번째 2분음표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소멸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 울림의 의미는 이미 언급된 모든 전제들이 청취자에게 현

    존할 때만 가능하다. 포괄적 청취로의 길은 네 번째 성부를 추가할 때 더

    확실해진다.

    위 음들을 훨씬 더 긴밀하게 묶어주는 것은 f'음이다. 이 f'음은 h'음과 함

    께 트리토누스(Tritonus, 증4도)를 이룬다. 이 트리토누스는 이 악절을 하나

    의 전체로 청취하도록 강요한다. 바로 이 하나의 전체 안에서 생명이 싹튼

    다. 여기서 특정한 진행을 향한 노력들과 경향들이 발전한다.

    이러한 방향지향적 성격은 트리토누스와 아주 대단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팔레스트리나 악곡에서도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이 상용된 것

    은 비로소 계속저음 시대에서였고, 그 때에 다음의 내용들이 정리되었다. 트

    리토누스(h'-f‘의 전위형 포함)는 하나의 특별한 형태이다. 이것은 유일한 동

    시울림으로 전음계 안에서 오직 한 곳에만 등장한다. 이것은 독특하여 결코

    혼동될 수 없는 형태이자 한 방향으로의 진행을 추진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하나의 통일체(Einheit)이다. 이것은 자체로 쉴 수 있는 것(in sich ruhen)이 아

    니라(협화음정이 아니다), 목적지향적이다. 이것은 자체 안에 (반음계 진행으

    로 다음 음에 진입하는) 두 개의 전음계적 이끔음을 함축하며 예보와 같은

  • 음악과 언어(Musik und Sprache) 6 9

    고유한 진행을 한다.

    이제 사람들은 트리토누스를 하나의 통

    일체로 파악하는 근거가 바로 그것의 이러한 진행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데 중세는 트리토누스를 ‘음악의 악마’(diabolus in musica)로 경원시하며 그

    사용을 금하였다. 그 이유는 이해될 수 있다. 하나의 울림에 종속된 음이 동

    시에 진행 지향성을 갖는다는 것은 초기의 음악적 사고에서 불합리한 것이

    었다. 그러나 오늘 이것을 더 선호하도록 하는 것은 이것을 악마로 규정했

    던 바 그 내용들이다. 여기서 트리토누스에서 발생하는 변화들을 음악적 청

    취의 시각에서 살펴보자. 팔레스트리나의 악곡은 한 음과 다른 음과의 관계

    에서 경과음이나 당김음의 불협화음정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 불협화음정

    은 외부에서부터 즉 독자적인 두 음들이 서로 마찰하면서 나타났다. 이 때

    어떤 한 음을 합법적이라 가정한다면, 다른 음은 그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사고는 트리토누스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다. 특정한 리듬적-선율적 변화는 한 개별음을 불협화적 음으로 만들 수 없

    다. 트리토누스 울림은 하나의 전체로서 자기 스스로(in sich selbst) 곧 내면

    에서부터(von innen her) 자신의 진행 근거를 갖고 있다. 이 사실은 이제 [음

    정을 구분하는] 기준이 더 이상 불협화적 [개별]음이나 협화적 [개별]음이

    아니라, 스스로 쉬거나(in sich ruhender) 앞으로 진행하려는 울림(vorw rtsdr

    ngender Klang)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트리토누스를 불협화음으로

    표기하는 것은 적합치 못하다.

    트리토누스는 일종의 효소처럼 작용한다. 이것은 ‘유기적인 것’의 씨앗을

    생명없는 ‘자연’으로 가져간다. 이것은 다른 울림들에게도 생명을 심어준다.

    이렇게 이것은 V-I라는 [화성학의] 일반적인 진행으로 연결되고 속칠화음

    (g-b-d-f)을 형성한다(108쪽 아래 예보 참조). 이 때에 울림들에 내재하는 경향

    들을 토대로 여러 울림들을 연결시키는 체계 곧 화성적 종지(harmonische

    Kadenz)가 생성된다. 예: 바하, 「마태수난곡」

  • 10 음악과 민족 제18호

    여기서는 팔레스트리나의 악곡에서처럼 개별음들이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울림들이 서로 연결된다. 이제 이 울림들은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화현(和

    絃 Akkord)들로써, 일종의 추상의 결과이고 이성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어

    떤 것이다. 이 화현적 울림들은 하나의 수직적 단면에 비유될 수 있다. 이들

    은 또한 변화 없이 오랫동안 울릴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스스로 장식(후

    에 성부진행으로 발전)하고 움직이며 시간 안에서 변화하는 힘을 갖고 있던

    중세의 동시울림들과는 더 이상 동일하지 않다(103쪽 참조). 이제부터 악곡

    은 새로운 종지법칙(Kadenzprinzip)에 따라 화현들을 연결해 가며 발전한다.

    악곡의 토대가 화현연결이라는 이 사실은 계속저음실제에서 분명하게 표출

    된다(78쪽도 참조).

    그리고 이 새로운 화현개념은 화성진행에 종속되는 부차적 진행층

    (Umspielungsschicht)의 생성의 전제가 된다. 예: 바하, 『평균율I』 푸가 c단조

    이렇게 계속저음 폴리포니는 팔레스트리나의 악곡(104쪽 참조)과 달리, 17

    세기의 기악음악에서 강력하게 요청되었던 모티브 및 시퀜스 형성을 그 핵

    으로 한다. 화현진행과 포괄적 청취는 팔레스트리나 이전의 비이성적 상황

    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지금 팔레스트리나 악곡의 단계를 전제로

    하고 이 전제들에 의하여 투명하게 되었다.

    종지(Kadenz)는 개별화현들을 질서짓고 나아가 이들의 역동적 일치와 긴

  • 음악과 언어(Musik und Sprache) 6 11

    장체계를 형성한다. 이렇게 화현들은 초기 울림들의 스스로 쉬는, 정적인 성

    격을 상실한다. 화현들은 다른 화현들과의 관련성을 갖게 되며 상대화된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의 목적 곧 유일하게 쉼을 제공하는 토니카화현

    (Tonika-Akkord)을 지향한다. 이 목적지향성과 토니카화현의 강요는 오늘 우

    리가 조성(Tonalit t)이라고 부르는 것을 창조한다. 그러나 이 조성은 서로

    다른 조성으로 이전하는 종지체계의 형성을 통하여 비로소 그리고 분명하게

    의식되었다. 이 종지들은 초기에 [현재보다] 더 높은 차원의 통일성을 지향

    하였다. 우리는 이 화현에서 전체 곧 작품(Komposition)까지를 늘 부분과 전

    체의 상호작용 관계로 이해한다. 개별적 지체(肢體)는 전체와의 관련성 안에

    서 그 의미를 갖게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유기

    적인 것’의 특징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미 팔레스트리나의 악곡이 자연과학

    적 인과율 관계와 유사성을 제공한다는 것을 보았다(107쪽 참조). 마치 그의

    악곡이 정확하게 계산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인과적 계산가능성은

    그러나 계속저음 악곡과 ‘유기적인’ 세계의 비교에서는 배제된다. 이러한 음

    악적 구조는 생물학의 목적론적 사고와 유사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계속

    저음 악곡은 결코 정확하게 배울 수 없다.

    악곡이 지속적으로 자신을 확대해 나아가는 것은 오로지 팔레스트리나의

    음악단계와 함께 출발한다. 이러한 팔레스트리나의 악곡에 의하여 새로운

    청취방법이 새롭게 조건지어진다(107쪽 이하도 참조). 개별화현들은 완성된

    기호(fertige Sigel)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폴리포니 성부진행을 통하여 매

    번 생성된다. 그러나 이들은 더 이상 성부진행의 우연한 결과물이 아니다.

    이들의 의미는 종지적 기능과 위치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적합한 화현연결 방법들이 모색된다. 계속저음 시대의 폴리포니는 ‘화성적’

    폴리포니(harmonische Polyphonie)이다. 이것은 기악적-기술적 사고의 형성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요청되었다(그러나 이 중요한 주제는 그러나 여기서 논

    외로 한다. 77쪽 및 110쪽과 비교하라). 몬테베르디의 구성요소들과 기악음

    악의 종합에 뿌리를 두고 있는 바하 음악의 기악화도 동시대의 성숙된 계속

    저음 악곡의 출현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이제 우리는 팔레스트리나에 대한 지금까지의 언급내용(107쪽 참조)을 변

    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즉 계속저음 시대의 악곡은 ‘자연적’(nat rlich)이지

  • 12 음악과 민족 제18호

    않고 ‘생동적’(lebendig)이다. 이것은 일종의 유기체(Organismus)와 흡사하다.

    이 악곡은 차갑고 고요히 솟아오르는 순수한 물과 비교될 수 없다. 이것은

    오히려 따뜻하고 혈관을 뛰게 하는 피를 상상케 한다. 팔레스트리나의 음악

    을 성격짓는 나(Ich)와 작품(Werk) 사이에 존재하던 거리는 완벽하게 그 의

    미를 상실한다. 새로운 악곡구조는 생명체의 모상으로, 우리 자신의 한 부분

    인 것처럼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이 마치 맛

    과 무관한 순수 물이라면, 이 새로운 음악은 흡사 맛을 내는 물일 수 있다.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은 언어표상(Sprachvorstellung)의 객관적인 것만을 파악

    할 수 있었으나(46쪽의 “descendit"예보와 49쪽 참조) 계속저음 시대는 언어

    를 감정표현(Affektausdruck)으로, 고통의 외침(Leidensschrei)으로 작곡하였다

    (52쪽도 참조). 예: 몬테베르디, 아리아나의 탄식(Lamento d'Arianna).

    이 유명한 음악적 감정표현법(Affekt-Geste)은 일종의 규범과 같은 것으로

    계속저음 시대를 일관하여 이어질 수 있었다.

    몬테베르디의 행위는 물론 악곡에 내재하는 음악적 변화만으로 이해될 수

    없다. 1600년의 음악적 새로움들 가운데 언어(Wort)와 직결된 업적은 매우

    중요하다. 음악가는 언어를 감정의 내용(Affekt-Gehalt)으로 파악하였다. 그리

    고 이것은 악곡에서 잠자고 있던 유기적인 것의 상징화 가능성을 결정적으

    로 깨우치고 구현하는데 기여하였다(이렇게 음악가가 유기체의 이름 아래

    모이기 시작한 후부터, 단삼화음은 고통의 표현과 묶여질 수 있었다). 이러

    한 관련성은 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새로운 음악에는 부수적이고, 특히 독일어에 의하여 크게 강조되었

    던 ‘내면으로부터’란 개념도(55쪽 참조) 계속저음 악곡의 유기적인 것에 그

  • 음악과 언어(Musik und Sprache) 6 13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사람들은 악곡기법에 종속된 이러한 내면성의 예로

    바하의 4성부 코랄들을, 예컨대 그의 수난곡에서 한 곡을 제시할 수 있다

    (110쪽 예보 참조).

    그러나 여기서 계속저음 폴리포니의 다른 특징에 대하여 고찰하자. 계속

    저음 폴리포니는 지속적으로 자신을 전개해 나아간다(111쪽 참조). 이것은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힘에 밀려 앞으로의 진행을 지속한다. 그리고

    마지막 화현에서야 비로소 휴식한다. 이것은 비록 잠재적이지만 매 순간마

    다 마지막까지의 진행을 함축하고, 악곡 전체를 이미 시작부분 안에 포괄하

    고 있는 것 같다. 작곡은 잠재적이지만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시간의 축 위

    에서 기획하고, 실현시키는 작업이다. 악곡이 연주실제에서 제시하는 것은

    기대에 상응한다. 물론 예견될 수 있는 것만이 그렇다. 시간은 여기서 독자

    적인 크기를 갖지 못한다. 이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의 확대로 표출된다. 이

    러한 정신적 구조는 과거에서 그리고 현재와 미래에서 어떠한 분열도 알지

    못한다. 이것은 세계를 시간이 초월하는 것, 아무런 문제없이 존재하는 것으

    로 이해한다. 종지(Ablauf)는 전에 이미 본 것처럼 나타난다. 이것은 마치 예

    언자의 자세와 흡사하다. 예언자는 자신의 실제를 그냥 시간의 선분(線分)

    위에서 읽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우리가 미래라고 부르는 것을 열어 보이

    기 위하여,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현실화하는 것과 흡사하다. 이러한 자

    세는 서사시(Epos)에 상응한다(사람들은 아마도 바하의 악곡구조와 서사시적

    자세를 일반적으로 라이프니츠(Leibnitz)로 대변되는 ‘제한적으로 규명된 의

    지’(Wille)의 제시내용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라이프니츠

    의 분석적 판단과 형이상학적으로 규정된, 즉 진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함

    축하는 주체(Subjekt) 개념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라이프니츠,

    「형이상학에 대한 담론」 8장).

    쉴러(Schiller)와 괴테(Goethe)의 서신교환은 서정시에 대한 질문도 담고 있

    다(1797년 4,5,12월). 괴테는 오디세이에서 여러 번 행복한 결과가 예고되었

    다며 “사람들은 좋은 [서사]시에서 결말을 미리 알 수 있고, 알아야 하며,

    그래서 어떻게(Wie)라는 것만이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러한 작품에는 호기심이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이러한 작품은 모든 부

    분에서 그것의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1947.4.22.). 그러나, 연극에서는

  • 14 음악과 민족 제18호

    놀라움의 순간을 배제하거나 결말의 마지막 작용이 미리 예견되는 것은 허

    락되지 않는다. - 괴테는 [이 서신들에서] 서사시와 연극의 차이를 설명하고,

    자신의 서사시 창작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 등의 개별적 특징들에 대한 질문

    들을 논의한다.- 쉴러와 괴테의 관점에서 볼 때, 이상의 언급은 정당하다.

    그러나 오늘의 관찰자들은 또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서사시와 연극의] 차

    이는 양식적 특징만으로 규정될 수는 없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언어 곧 인

    간적-정신적 자세에 의하여 규정된다. 이 첫 단계 즉 (언어에서도 음악에서

    도) 의미소지자[=작품]의 구조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겨지지 않는다. 이것

    은 사건들의 서사시적 혹 연극적 표현방법의 사용과는 별개의 것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늘 고유한 역사의 총체이자 결과이다. 이것의 불가능한 것을

    구현하는 일은 개인의 손에 달려있지 않다. 사람들은 자신이 서사적 시나

    연극적 시를 써야 할 것인지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없다. 창조적 행위는 오

    히려 의미소유자의 가능성들을 현실화시켜주는 자발적인 투신(投身)에 달려

    있다. 비극이 호머의 시대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처럼, 제대로 된 서사

    시는 기원전 5세기에 창작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호

    머의 서사시는 앞에서 언급한 예언자의 자세와 유사함을 갖고 있다. 그러므

    로 서사시가 더 높은 힘에 의하여 보호되는 것처럼, 중단없이 파괴되지 않

    은 어떤 것으로 생성된다는 사실은 우리를 기쁘게 한다

    바하의 음악은 이와 유사하게 우리에게 작용한다. 그래서 바하의 수난곡

    도 서사시적 부분을 보여준다. 이미 내용 면에서 그렇다. 여기에는 어떠한

    놀라움도 없다. 사람들은 [수난곡의] 끝을 이미 알고, 예견되며, 그리고 그리

    스도도 그것을 알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예언자의 자세를 갖는다. 이것은

    음악에 의하여 객관적 형상 안으로 투사된다. 사람들은 수난곡이 차원높은

    고통을 표출하기 때문에 자주 왜곡하지만, 이 수난곡을 연극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생명체의 상징으로 계속저음 악곡은 고통과 번뇌를 표현할 수 있

    다. 그러나 연극의 고유한 특징은 행위(Handeln)이다(그리스어 drama는 ‘행

    위’를 의미한다). 여기서 [그의 코랄전주곡] 「당신의 어전에서」(Vor Deinen

    Thron, 81쪽 참조)를 살펴보자. 바하의 음악 곧 정신으로 꽉 채워진 이 형상

    은 말하는 자(des Sprechenden)의 단계에 분명 도달하였으나, 아직 소박하고

    대중적인 코랄선율의 토양위에서 생장한다. 이것은 참 소박함의 모태에 안

  • 음악과 언어(Musik und Sprache) 6 15

    주한다. 물론 그 안에 서사시적 자세와 관련되는 어떤 것을 갖고 있다. 즉

    수난곡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은 단순한 묘사나 통례적 의미에서의 순수

    예술이나 시가 아니라, 진실된 사건 자체이다.

    바하의 기악적 폴리포니가 말하는 것과 참 소박함의 자세는 주체와 유기

    적의 것의 단계를 성격짓는 작품(Werk)이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는 것과 관

    련된다(111쪽 이하 참조). 이렇게 바하의 음악은 자주 복음말씀이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Vaterunser)의 서사시같은 단순한 서사시1)를 기억케 한다.

    이것은 신앙고백이나 기도를 연상시킨다. 바하의 음악은 유일하게 기도의

    자세를 취하도록 한다. 그 명백한 예는 그의 마지막 작품 「당신의 어전에

    서」라는 [오르간 독주를 위한] 코랄전주곡(Choralvorspiel)이다.

    3) 105쪽의 각주 1을 참조하라. 그 의견은 음악적 진행의 리듬적 감동에 관한 것이다. 여기는 이

    와 다르게 그 의미내용을 뜻한다.

  • 16 음악과 민족 제18호

    *

    이제 우리는 제 3단계, 곧 비엔나 고전주의 음악가들의 악곡에 대하여 고찰

    하자. 우리는 이 단계를 앞장의 진술들과 관련하여 논의할 것이다(89-96쪽).

    우리는 앞에서 비엔나 고전시대의 음악을 특별히 인간적 행위에 대한 이

    해로 파악해야 한다는 확신에서부터 출발하였다. 무대음악이든 기악음악이

    든 상관없이 우리는 그것을 우리 현실에서 여기 그리고 지금 일어나는 사건

    들로 지각한다. 이러한 [정신]자세로 창작된 악곡의 기법적 특징은 우리가

    하이든의 첫 사중주에서 알게 되는 것처럼 비연속적인 것(das Diskontinuierliche)이다.

    우리는 여기서 중단없이 변하는 과정을 체험할 수 없다. 화현들은 지속되는

    화성적 폴리포니에서처럼 성부진행에 의하여 생성되지 않는다(111쪽 참조).

    이것들은 한 세기동안의 오랜 폴리포니기법으로 그 의미를 충족시킨 후, 지

    금은 종지형태의 한 약속으로 사용된다. 계속저음은 이러한 새로운 [정신]자

    세를 소화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계속저음은 폐지되었다.

    우리는 [하이든의 현악]사중주 33-2번의 론도주제에서 어떻게 비연속적인

    것이 고전시대의 절정기에서 효과를 발휘하였는지를 보았다. 이것은 사람들

    이 거의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유연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이 악곡은 고유하

    고 새로운 동기를 내포하고 있는 여러 개의 고정된 부분들을 하나의 전체로

    묶어 파악할 때에 비로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상하지

    못한 변화를 순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늘 깨어있을 필요가 있다. 바하나

    팔레스트리나와 달리 이 곡의 진행과정에서는 마치 무(無)에서처럼 전혀 모

    르는 힘이 솟구친다. 이 힘은 사건을 [음악적으로] 형상화하는데 결정적 역할

    을 담당한다(여기서 계속저음 악곡을 라이프니츠의 주제 개념과 비교하자

    (113쪽 참조). 비엔나 고전시대의 악곡은 진술이 개념의 함축범주를 넘어 확

    대되거나, 그 반대로 판단과정에서 어떤 것이 그 개념으로 삽입되는 칸트의

    종합적 판단(synthetischer Urteil)과 유사함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이 음악은

    자체로 지휘의 필요성을 갖게 된다. 이제 비로소 내면에서부터 지휘를 요구

    하는 음악이 탄생되었다. 이제 새로운 의미소유자[=악곡]는 [연주실제에서]

    놀라움들을 표출하며 작업한다. 이 악곡은 더 이상 서사시적 언어가 아니라

    연극적 언어이다. 그리고 이것은 음악극장(Theater)을 설립케 한다.

  • 음악과 언어(Musik und Sprache) 6 17

    지휘자와 극장의 출현은 후속 사건을 가능케 한다. 지휘자와 극장은 대상

    (Gegen ber)을 창조하고 거리를 만든다. 그리고 나는 현재 내 앞에서 움직

    이는 사람을 인지할 때, 이 사건을 하나의 대상으로 파악한다. 이 대상은 실

    제적인 것이다. 그러나 나의 고유한 실재와 동일하지 않다. 그것은 살아 숨

    쉬는 사람들로써 그곳, 자신들의 위치에서 살며 활동한다. 이들은 나의 고유

    한 활동영역 안에 속하지 않는다. 이들은 나에게 다가온다. 서사시적 형태를

    성격짓는 ‘그것은 본래 그랬다’라는 소박한 믿음은 여기에 더 이상 존재하

    지 않는다. 무대는 내가 살아 숨쉬는 사람을 인지한다는 점에서 분명 서사

    시보다 더 실제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무대는 [서사시보다] 더 비실

    제적이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 단순히 만들어진 허구로 그냥 나에게 다가오

    는 것이기 때문이다. 극장실제(Theaterwirklichkeit)에서의 대상은 바로 이 목

    적으로 창조되고, 창조자가 [창조된] 것을 합목적적으로 생각하듯이 그렇게

    짜여진다. 극장은 흡사 일종의 실험의 무대일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

    을 현재의 것으로 제시할 수 있기 위하여, 그리고 그 사건을 극장실제로 즉

    비연속적인 것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요청되는 합목적적 실험규정에 매번 맞

    추려 한다.

    대상의 창조를 직접 체험하는 청중에 대한 배려는 비엔나 고전시대 음악

    의 특징을 화사한 ‘광채를 발하는 것’(Ausstrahlung)으로 성격짓게 하는 또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청중의 감동을 배가시키는 음의

    강약과 템포의 변화를 조절함으로써 가능하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이것을

    작곡수단으로 사용한다. 이 작곡수단들은 글로 고정된다.

    그러나 우리가 논하는 고전시대 악곡구조의 상위 특징은 현실적으로 행위

    하는 것이고 따라서 비연속적인 것이며 독자적인 작은 자극으로부터 악곡을

    합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러한 부단없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하나의 전체로 묶어주는 형식적 요소 곧] 일치성(Einheit)이 무엇인

    가를 물어야 한다. 여기서 변하는 것은 리듬과 음의 소재들(rhythmisch-

    tonliche Ausf llung)이고, 불변으로 남아있는 것은 박절적 무게분배(metrische

    Gewichtsverteilung)이다. 예컨대, 비엔나 고전시대 음악의 본질적인 표현인

    갖춘마디와 못갖춘마디로 발생하는 자극들의 교체는 바로 여기에 기초한다

    (베토벤 마지막 시기의 작품 곧 비엔나 고전시대의 음악이 갖춘마디와 못갖

  • 18 음악과 민족 제18호

    춘마디를

    경구적으로 상호 대립시키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 58쪽과 비교). 하나의

    동일한 리듬, 예컨대 에서 갖춘마디( )와 못갖춘마디( )의

    다양한 리듬 형태들이 생성될 수 있다(55쪽 참조). 이것은 또한 도미난트-토

    니카로 이어지는 화성진행의 다양한 박절적 사용도 가능케 한다(93쪽 참조).

    이 모든 예에서 일치성을 도출하는 것은 정제(精製)된 새로운 박자개념

    (Taktbegriff)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전주의자들의 정신적 업

    적은 당시까지 추정해 오던 리듬 및 음의 형태와 박절적 무게분배의 일치성

    을 서로 다른 두 개의 독자적이고 사용가능한 양(量)으로 분해하였다는데

    있다. 이를 통하여 고전시대의 정신은 음악적 의미파악에서 새로운 단계에

    도달하고, 음악 곧 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였다. 그리고 악곡기술의 변

    화를 초래하였다. 앞선 시대에서 듣지 못하던 내용을 함축하는 비엔나 고전

    시대 음악의 새로움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박자(拍子)는 이미 계속저음시

    대의 기악음악에서 널리 사용되었다(81쪽과 비교). 그러나 비엔나 고전시대

    의 악곡은 그 후속 결과들을 도출하여 단순 관계체계로서의 순수한 박자개

    념을 창출하였다. 비엔나 고전시대의 음악은, 독일어가 그리스어와 반대되는

    내용을 제시하는 것처럼(4쪽이하, 53쪽이하, 80쪽 참조), 고대 이후 다양한 과

    정을 거치며 진행되어 온 리듬변화의 마지막 단계로 등장한다. 즉 그리스의

    리듬은 본래 [변화가 불가능하게 이미] ‘꽉 채워진 시간’(erf llte Zeit)에 기인

    하였으나(5쪽 참조), 이것의 마지막 결과는 비엔나 고전주의자들에 의하여 -

    비로소 이들에 의하여 - 시간의 차이(Zeitabsteckung)와 시간의 채움(Zeitausf

    llung)의 구분에서부터 얻어졌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요술피리-행진곡의 시작부분을 고찰하자.

  • 음악과 언어(Musik und Sprache) 6 19

    우리는 독자적인 부분들에 대한 고전시대 원칙이 극도로 단순한 자세에서

    적절하게 수행되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즉 모든 두 번째 마디는 새로운 자

    극을, 즉 고유한 형태와 독립된 의지를 갖는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첫

    부분 (Teil)은 2박자의, 4개의 이질적인 악구(Glied)들로 구성된다. 그 첫 악구

    는 갖춘마디로 출발하는 2분음표들로 자체로 정적이다. 그러나 두 번째 악

    구는 못갖춘마디의 4분음표들로 전진적이다. 세 번째 악구는 다시 갖춘마디

    이나 선율의 [새로운 전진을 위한 일시적인] 휴식 그리고 이어지는 점4분음

    표들에 의하여 빠르게 몰아치는 긴장감을 형성한다(마지막 순간까지 즉, 여

    섯 번째 마디의 마지막 8분음표까지). 네 번째 악구 역시 갖춘마디, 점8분음

    표들에 의하여 예리하나 또한 그 자체로 정적이다. 이 마지막 악구는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난 예상 밖의 충격처럼 세 번째 악구의 긴장감을 약화

    시킨다(이러한 구조는 고전시대 조형물의 균형에 대한 것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형태의 현란한 다양성은 외형적으로 매끄럽고 우아하며 두 마디씩

    균형을 유지하는 대중적 체계에 의하여 우리에게 친숙감을 준다. 그러나 중

    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구조의 이면에서 새로운 박자(Takt)개념이 등장한다

    는 사실이다. 모든 재료들로부터 해방된 이 박자는 이질적인 악구들을 하나

    로 묶어준다. 왜냐하면 이 박자 안에는 서로 상충될 만한 어떠한 재료들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자는 단적으로 표현하여 오직 정신 안에서 일치

    성을 형성하는 일종의 관계체계(Relationssystem)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

    은 박자가 수공예작품 안에서 재료를 완벽하게 부인하고(칸트의 표현대로)

    단순한 형식(Form)이 되어버린 하나의 요소(Faktor)로 작용하는 마지막 가능

    한 추상임을 의미한다. - 여기서 사람들은 성숙한 고전시대가(하이든의 현악

    사중주 작품 33번과 모차르트의 ‘유괴’로) 이미 1781년에 시작하고, 아울러

    칸트의 관조, 공간과 시간의 순수 형식을 도입하였음을 깨닫게 한다. 이는

    서양의 정신사에서 순수 시간개념과 순수 박자개념이 동일차원에서 함께 사

    용되기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

    악곡의 정신화의 위대함이여! 요술피리-행진곡은 우리 안에 정신적 활동

  • 20 음악과 민족 제18호

    즉 자율적 정신력에서 비롯된 본래의 정서를 우리 안에 불러일으킨다. 그렇

    다. 항상 자유롭게 투입되고 독특한 모양으로 고정된 이러한 형태들은 결코

    인과론적이나 목적론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어도 마치 ‘정신적 자유’의 상징

    처럼, 인간적 즉 자유의지의 상징처럼 작용하고 있다. 비엔나 고전시대의 음

    악은 인간을 그의 본질 안에서 순전히 인간적인 것, 자유의지, 음악적 수단

    들과 함께 하는 인간적 행위로 이해하도록 유보되었다. 고전시대 음악가들

    이전이나 이후의 어떤 음악도 그 내면에 이러한 독특한 의미나 이와 유사한

    것을 담고 있지 않다.

    독자적인 여러 악구를 하나로 묶은 고전시대 악곡 곧 자유의지의 상징은

    연주에서야 비로소 그 일치성을 구현할 수 있다. 악곡 곧 자유의지는 이해

    하는 ‘나’(Ich)에 의하여 의미있는 어떤 것이 된다. 이 일치성은 예컨대 바하

    나 팔레스트리나에서처럼 직관적-음악적인 것, 객관적-음악적 사건의 단계에

    서 이미 발견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대상(곧 음악)에서부

    터 추상된, 말하자면 우리의 ‘나’의 자율성과 관련된 순수 정신적 범주 안에

    서 생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이해하는 우리 의식(Bewu tsein)의 순

    수 일치를 가능케 하는 모든 대상성 안에서 나타난다. 비엔나 고전주의자들

    의 자유는 바로 칸트의 자유이다. 이것은 거기서부터 의미파악이 비로소 이

    루어질 수 있는, 마지막 출발 가능점에 도달해서야 실현된다. 이 마지막 정

    지(Halt)가 바로 ‘통각(統覺)의 일치’(Einheit der Apperzeption)이다. 그러나 바

    로 여기서 우리의 ‘나’, 우리의 통각능력, 우리의 활동성의 가능한 마지막

    긴장이 형성된다. 비엔나 고전주의자들은 음악적 가능성의 극단적 경계에

    도달할 때까지 음악수단의 사용 면에서 극도의 정신화를 추구하였다. 작품

    을 자율적-의미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적

    재료와 아무런 유사성도 갖고 있지 않는 순수 정신적인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자율적 언어로서의 음악언어가 힘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고전시대 음악의 또 다른 마지막 특징. 우리가 고찰한 것처럼, 서사시적

    태도(Haltung)는 확대(Entfaltung)가 내재하는 악곡에 상응한다. 과거, 현재, 미

    래는 여기서 중단없는 하나의 전체를 형성한다. 시간은 독립된 독자적인 어

    떤 것(Gr e)으로 존재하지 않는다(113쪽 참조). 극장태도(Theaterhaltung)에

  • 음악과 언어(Musik und Sprache) 6 21

    상응하는 고전적 악곡은 이와 반대로 비연속적이다. 그리고 진행과정에서

    예견할 수 없던 어떤 힘들이 관여하며 그 진로를 변화시킨다. 시간은 비엔

    나 고전시대의 음악에서 더 이상 예견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우리는 시

    간을 독자적인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비엔나 고전시대의 악곡은 그

    시대의 자아의식이다. 여기서 시간성[개념]이 생겨났다. 지금과 여기를 강조

    하던 서사시적 일치성은 현재와 미래로 분해되었다. 이렇게 순간의 의미를

    파악한 것은 비엔나 고전시대 음악이 처음이다. 이제야 비로소 요술피리의

    ‘Die Stunde schl gt’(그 시간이 울린다)나 피델리오의 'O Gott! Welch' ein

    Augenblick!'(오 하느님, 이 황홀한 순간을!) 혹은 장엄미사의 ‘Et homo factus

    est'(사람이 되시어, 101쪽 참조)와 같은 악곡들이 출현할 수 있다. 비엔나 고

    전시대 음악의 심장은 바로 이러한 악곡들에서 박동한다.

    트리오 ‘Soll ich dich Teurer nicht sehn?'(내가 너를 더 귀한 존재로 볼 수 없

    단 말이냐?)의 후반부 ‘die Stunde schl gt’의 반복부분은 사라스트로가 노래

    한다(제19번). 이 번호의 악곡은 사라스트로의 마지막 ‘Die Stunde schl gt’를

    제외하고 여리게 연주된다. 이미 두 마디씩 여리게 반음계적(b h c cis d)으로

    상행하며 ‘die Stunde schl gt’를 세 번이나 선언한 이 반신(半神) 사라스트로

    는 이제 이성을 잃는다. 그래서 그는 불과 한 마디 후에 최고음역에서 큰

    소리로 외친다. 지금에 대한 의식, 즉 행위에 대한 의식은 모든 것을 태우는

    불처럼, 모든 것을 파괴하는 거대한 힘처럼 보여진다. 이것은 실존자체(神)

    의 계시 때처럼, 그리고 의미(Sinn) 즉 영원함이 지금, 다시 되돌아올 수 없

    는 순간 그 자체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을 때처럼 마치 낙뢰(落

    雷)의 섬광와 같다. 여기에 헛소리를 지껄이듯 파미나와 타미노의 콜로라투

    어가, 그리고 사라스트로의 ‘wir sehn uns wieder'(우리는 다시 만난다)가 뒤따

    른다. 사라스트로의 이 노래는 깊은 신뢰 속에서 신을 본 후의, 지금의 우리

    인간을 위로한다. - 이제 사람들은 고전주의 음악가들이 시간에 대한 긍정적

    인 인식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나간

    과거와 남아있는 현재 곧 의미의 불일치성에 대한 의식은, 그리고 이 모순

    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은 비극적인 것(das Tragische)을 발견하였다. 이 비극

    적 지혜는 고전주의자들을 성격짓는 하나의 특징이다. 이것은 서양의 역사

    에서 단 한번, 1781년부터 1828년까지의 시기에 비엔나에서 음악이 되었다. -

  • 22 음악과 민족 제18호

    서양음악은 이렇게 창조의 과정을 새롭게 완성하였다. 이것은 캐롤링 시

    대부터 팔레스트리나까지의 소리(음향)와 어휘(언어)의 지속적 논쟁 안에서

    저절로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어서 자연과 유기적인 것의 단계로

    넘어가며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였다. 이제 음악의 구조는 정신 곧 자유의

    상징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노(老) 하이든은 자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에서 인간을 아래와 같이 적합하게 노래할 수 있었다.

    품위와 숭고함의 옷을 입고 아름다움과 강건함 그리고 용기를 부여받은 인간은, 대장부는, 자연의 왕은 하늘을 향해 굳건히 서있다.

    이러한 내면적 권리의 획득은 비엔나 고전주의 음악의 창시자 하이든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하였다. 하이든은 인간을 전신(全身)의 조형물과 같은 것

    으로 제시하며, 인간을 음악적으로 새로 창조하는 데 적합한 음악언어를 처

    음으로 구사할 수 있었다.